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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처럼 걷자, 꽃처럼 웃자
by 소년 아
껌 권하는 사회
노트북에 책에 셔츠까지 들어있어서 무거운 가방을 발 밑에 내려놓고 서서 졸고 있던 나는 갑자기 등이 강하게 밀쳐져 앞으로 넘어질 뻔 했다. 중심을 잡은 후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심하게 토해서 바닥은 온통 구토물 투성이에, 사람들은 폭탄이 떨어진 현장을 피하듯 둥그렇게 그 자리에서 떨어져 서 있었다. 앉아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일어나 자리를 피해서 남자를 중심으로 반경 1m의 반원만큼은 투명한 막이 쳐진 듯 했다.

남자가 느닷없이 토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구토물을 피하기 위해서 한꺼번에 물러서다가 나도 밀쳐진 것이리라, 생각하며 조금 떨어져 물러나려고 가방을 들고 몸을 돌렸다.

토한 남자는 술에 취한 것 같이 보였는데, 어린 얼굴이나 옷차림이 대학생 같았다. 종강 후 거하게 술을 마신 걸까, 친구가 군대라도 가는 걸까. 밤 11시에 저 지경으로 취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신발과 바지까지 더럽히고도 속이 불편한지 등을 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하니 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 역에서 전철을 타는 사람들도 더럽혀진 바닥을 보면 곤란한 기분이 들겠구나.

나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서 바닥을 덮기 시작했다. 주유소 휴지는 뒤 닦을 땐 별로지만 이럴 땐 정말 좋다니까 생각하며, 남학생에게도 손과 바지를 닦으라고 몇 장 주는데,

순간, 공기가 변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눈살만 찌푸리고 섰던 한 아저씨가 읽던 신문을 내게 건넨다. "고맙습니다." 나는 그 신문을 받아서 바닥의 오물을 덮었다. 앉아있던 다른 아저씨도 자신의 신문을 내게 주려고 하자, 아저씨와 나 사이에 서 있던 한 청년이 그 신문을 받아서 내 곁에 다가와 함께 구토물을 치웠다.

정신이 좀 들었는지 학생은 발 밑에 우리가 덮어 놓은 신문지로 자신이 쏟아 낸 토사물을 그러 모으면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내가 손과 얼굴을 닦으라고 준 물티슈로는 전철 의자에 묻은 오물을 닦았다. 착한 남자애구나.

내가 물티슈를 더 꺼내고 있을 때 꽤 멀리 떨어진 의자에서 한 아주머니가 일어나 다가오셨다. "그만 닦아도 돼. 몸은 괜찮니?" 아직도 바닥을 닦고 있는 남학생에게 이모처럼, 어머니처럼, 선생님처럼 말을 건넨다. "괜찮아요. 술을 많이 해서... 미안합니다." 남학생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여전히 취한 채로 대답한다. 아주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물티슈를 열어 서 너장 뽑아서 남학생에게 건넨다. "이제 그만 닦고 구석에 일단 두렴. 얼굴이랑 손도 좀 닦고." 남학생은 얌전히 휴지로 얼굴과 입, 더럽혀진 손을 닦는다.

가방을 뒤적이던 나는 일요일, 성당 앞 아저씨에게서 산 후라보노 껌을 발견한다. 껌을 열어서 남학생에게 내미니,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나도 괜찮아요." 나는 다시 껌을 권한다. 남학생은 겨우 하나 받아서 포장종이를 뜯으려다가 바닥에 떨어 뜨린다. 취기에 어리숙한 행동이 어린 동생같이 느껴져서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껌을 하나 더 꺼내서 종이를 벗긴 다음에 불쑥 내밀었다. "..." 남학생은 당황해서 눈 앞의 껌을 한 번 보고,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껌을 한 번 본다. "자-." 장난끼가 돌기 시작한 나는 껌을 더 가까이 들이민다. 남학생은 저도 모르게 내가 권하는 껌을 입으로 받아 먹는다. 우물우물-

분명히, 지독하게 취하지 않았으면 얼굴이 빨개졌을거야. 나는 속으로 살짝 웃으며, 내릴 문 쪽으로 다가선다.


문득,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말 아주 작은 것이로구나 깨닫는다.

내가 먼저 휴지를 꺼내는 것, 그 행동이 아저씨의 신문으로, 청년의 도움으로, 남학생의 청소와, 아주머니의 물티슈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기적과 다를 게 무엇 있겠는가. 나의 마음은 두근두근 하였다. 아주 작은 행동이지만, 변화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다. 매우 일반적인 일이지만 특별한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순간이며, 일상인 동시에 삶의 기적인 것이다.


남학생은 내릴 역에 도착하자 토사물 범벅인 신문지를 끌어 모아서 손에 든다. 내가 손가락을 들어 가장 가까운 휴지통을 가리키자 비틀비틀 걸어가서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비틀비틀 전철역 계단을 올라간다, 껌을 우물우물 씹으며.
by 소년 아 | 2010/06/19 01:23 | LIFE | 트랙백(1)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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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at 2010/06/19 08:55

제목 : 작은행동
껌 권하는 사회 <-클릭! 모이면 기적...more

Commented at 2010/06/19 01:2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소년 아 at 2010/06/19 01:37
앗>///<♡♥♥♥♥ 포오옥-♥♥
헤헤, 착한 건 남자애였는걸요.
Commented by 풍경 at 2010/06/19 08:54
와, 작은 행동이 정말 기적을 만드네요!! ^ㅡ^
Commented by 소년 아 at 2010/06/20 21:54
변화 자체가, 삶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10/06/19 10:25
정말 감동스러워요!
그 상황에서 먼저 그렇게 행동하시다니, 우리 소년 아 님 정말 존경스러워요!
Commented by 소년 아 at 2010/06/20 21:54
별 말씀을 다 하세요, 그저 곰같은 남자애가 안쓰러웠을 뿐예요=)
Commented by The Lawliet at 2010/06/19 15:19
이....이것은 제 일상에선 생각도 못한 이야기 ㄱ-
Commented by 소년 아 at 2010/06/20 21:55
이런, 시아 님, 다음부터 전철에서 토하시면 제가 도와드릴게요!(응?)
Commented by minci at 2010/06/19 22:34
각박한 세상 아님
역시 훈녀시라니까요^^
Commented by 소년 아 at 2010/06/20 21:55
훈녀 아님! 엣헴-!
Commented by osori at 2010/06/21 00:13
제가 비슷한 일을 겪었던 때가 생각나네요. 그 때 님처럼 행동하지 못했던 제가 부끄럽네요 .
Commented by 소년 아 at 2010/06/21 09:04
아하하하, 의외로 곤혹을 치르신 분들이 많으신가봅니다.
저라고 딱히 생각이 있어서 행동한 건 아니니까 마음 놓으셔도 되시어요^ㅁ^
다음번엔 오소리 님도...라고 적으려다가, 아니다, 저런 상황은 겪지 않으시는게 최선이신 듯+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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