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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처럼 걷자, 꽃처럼 웃자
by 소년 아
혼자 야근, 아니지, 원거리 둘이 야근
1. 
데이터를 좀 자세히 들여다본 1월, 2월, 시스템에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나간 사람의 아이디 로그가 계속 눈에 띄었다. 내가 이거 뭔지 아냐고 물어봤더니 팀원들은 모른다고 했다. 나는 누가 아이디를 도용하는 것 같아서 관리자 권한으로 비밀번호를 바꿔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협력사에서 전화가 왔다. 자기들이 영업담당자 대신 그 아이디를 사용해서 시스템 승인을 하는데 아이디를 사용할 수 없으면 일을 못 한다는 거다. 


2. 
나는 아이디를 빌려주면 안되고, FM이라면 영업담당자가 승인해야 하니 담당자에게 요청하라고 했다. 그제서야 팀원들은 자기들이 준 건 아니지만 협력사에서 알아서 처리하고 있었던 건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들은 너무 바빠서 협력사에 아이디를 꼭 줘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디를 주는 건 안되고, 업무 로드가 많이 걸리는 부분만 협력사도 승인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꿔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 까지는 담당자들이 승인하고, 정 바쁜 경우 내가 승인하겠다고 공지했다.


3.
그리고 담당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 수술 날 휴가를 냈는데 그 날 협력사가 팀원들에게 승인해달라고 했더니 오늘 일 하지 말라고, 나 오면 하랬다고 전해 들었다.


4. 
일부분 승인권한을 협력사에 넘기는 시스템 개발 때문에 팀장님과 같이 관리팀 담당자들과 회의를 했다. 내가 영업담당자들이 많이 힘들다고 말하자 관리팀 과장님은 불편하라고 만든 시스템이라고 했다. 우리는 관리팀에게 반려먹고 돌아왔지만, 나는 팀장님 결재만 있으면 바꿀 수 있는 매뉴얼을 바꿔서 프로세스를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 꼼수를 팀장님이 반려하셨다. 팀장님 생각에도 영업담당자가 승인하는게 맞다고 하셨다.  


5.
결국 시스템 개발이 불발되었고 팀장님은 팀원들에게 담당자들이 자기 꺼는 바빠도 짬 내어 승인해주라고 지시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원들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았고 협력사는 계속 나에게 요청했다. 


6.
이 과정에서의 문제점 : 
1) 우리 팀의 1/2과 협력사 A는 바쁜 와중에도 정식 프로세스대로 팀원들이 잘 승인하고 있다.
2) 1/2 팀원이 워낙 바빠서 승인을 못 했으면 그들 스스로 프로세스를 개선했어야 하나, 자신의 권한을 대놓고 이양했다.
3) 그래놓고 내가 물어보니 모른다고 말했다.
4) 그래놓고 내가 아이디 막았으니 나보고 엿 먹으라고 팀장이 지시한 일도 하지 않았다.
5)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해서 팀장을 설득할 생각하지 않고 입 닥치고 있고, 나만 죽어라 팀장님한테 징징댔다.


7.
그래서 나는 1/2 팀원들을 관리하는 과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왜 나만 말해요? 다 같이 바꿔야 한다고 말해야 팀장님이 심각함을 알죠. 나만 말 하니까 팀장님은 이 일이 심각한지 모르잖아요. 
과장님은 자기 애들을 변호했다. 
애들은 자기가 한 마디 더 하면 회의가 길어질까봐 말을 안 하는 거에요.
나는 과장님에게 다시 말했다.
과장님, 같이 말해야 팀장님이 이게 진짜 심각한줄 알아요. 나 혼자 얘기해선 변하지 않아요.


8.
그리고 그날 저녁 과장님은 팀장님을 자기 자리 옆에 앉혀놓고 시스템을 시연했다. 팀장님은 약간 심각함을 느끼고, 당장 이번 주말, 그러니까 3월말 매출 정산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협력업체에 주라고 했다.


................헐.


9.
그래서 나는, 오늘과 내일 내가 협력업체 직원 야근 시켜서 같이 처리해보겠다. 아이디 줄 거면 목요일에 줘라, 일단 해보겠다. 라고 말했다. 같잖은 말인데 선언처럼 되어버렸다.


10.
그래서 팀장님과 정상적으로 일하는 1/2 팀원과, 정상적으로 일하지 않는 1/2 팀원들 모두 팀 회식 갔는데 나는 혼자 사무실에 남아서 저 멀리 남쪽에 있는 협력업체 주임을 붙들고 야근을 하고 있다. 다행히도 협력업체 직원 분이 내 의견에 따라서 잔업해줘서 고맙다.


11.
한 달 동안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이 떠올랐다.

여름이었다. 많이 더웠다. 그 때는 아직 교실에 선풍기밖에 없었고,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우리 학교는 교실 하나에 선풍기가 4대나 있었다. 오후 수업, 수학 시간이었다. 보충수업도 아니고 정규 수업이었다. 수학 선생은 교실에 들어와서 교탁 앞에 서서 우리 교실을 훑어보았다. 

주번, 양동이 2개에 물 떠와.

주번은 물을 가져왔다. 더운 여름이면 선생님들은 교실 앞과 뒤 넓은 바닥에 물을 뿌려서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때도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수학 선생은 우리에게 교실 뒤로 책상을 밀라고 했다. 양동이 하나는 교실 왼쪽 끝에 놓고, 다른 하나는 교실 오른쪽 끝에 놓았다. 그리고 맨손바닥으로 교실 바닥을 청소시켰다. 교실이 너무 더럽다는 이유였다. 

맨손을 왼쪽 양동이에 담가서 손바닥에 물을 묻혀서 손바닥을 걸레삼아 교실바닥을 쭉 닦고 오른쪽 양동이에 손을 닦은 다음에 자기 책상을 끌고 와서 앉는 거다.

애들은 조금 웅성거렸지만 선생이 시키는대로 하기 시작했다. 

나는 짜증이 났고 손을 들고 선생에게 물었다. 

왜 우리가 맨손으로 교실을 닦아야 해요? 

선생은 나를 잠시 쳐다보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음 차례 학생을 지목했다. 다음 차례 아이도 쭈그리고 앉아서 바닥을 맨손으로 닦았다. 

나는 다시 선생에게 물었다. 

지금 수업시간인데 왜 이렇게 해야 해요?

선생은 나를 쳐다 보지도 않았고, 아이들은 차례차례 교실 바닥을 닦았다.  


결국 내 차례가 되어서 나도 맨손으로 교실 바닥을 닦았다. 나만 안 하면 다른 친구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12.
왜 나만 선생에게 질문했을까?

왜 나만 팀장님에게 힘들다고 바꾸자고 말할까?

왜 다른 아이들은 나중에 선생 욕만 했을까?

왜 다른 팀원들은 자기들끼리 담배 피우면서 팀장 욕만 할까?


내가 그렇게 이상하고 별난 아이였을까?

내가 그렇게도 엿 먹어야 하는 선배 직원이었을까?


13.
팀장은 자기가 시키는 대로 아이디를 바로 넘겨주지 않고, 팀 회식도 안 가고 협력업체 직원까지 붙들어서 끝까지 일을 하고 있는 내가 미련하고, 쓸모없고, 재수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내가 좀 멍청하고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은 한다. 
by 소년 아 | 2017/03/28 20:43 | LIFE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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